치로 페라라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수비수로 활약했다. 나폴리 유소년팀에서 시작하여 1984년 1군으로 승격,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나폴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94년 유벤투스로 이적하여 5번의 세리에 A 우승을 포함, 다수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05년 은퇴 후에는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의 기술 스태프로 활동했으며, 유벤투스 감독과 이탈리아 U-21 대표팀 감독 등을 역임했다. 선수 시절에는 강력한 수비력과 리더십으로 평가받았으며, 현재는 자선 재단을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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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로 페라라는 SSC 나폴리 유소년 팀 출신으로 1984-85 시즌 1군에 합류했으며, 1985년 5월 5일 유벤투스를 상대로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렀다.[50] 이후 나폴리에서 주전 수비수로 성장하여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1986-87 시즌과 1989-90 시즌 리그 우승, 1987년 코파 이탈리아 우승, 1989년 UEFA컵 우승 등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었다.[50] 마라도나가 팀을 떠난 후에는 주장직을 맡기도 했다.[50] 나폴리에서의 자세한 활약은 나폴리 시절 문단을 참고할 수 있다.
1994년 여름, 자신을 나폴리에서 지도했던 마르첼로 리피 감독을 따라 유벤투스로 이적했다.[52][50] 유벤투스에서도 핵심 수비수로 활약하며 풀백과 센터백을 오갔고, 파올로 몬테로 등과 강력한 수비 라인을 구축했다.[50] 유벤투스 소속으로 6번의 리그 우승(2001-02 시즌 포함[50], 2004-05 시즌 우승은 이후 칼초폴리 스캔들로 박탈됨), 1995-96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인터컨티넨탈컵 우승 등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50] 챔피언스 리그 결승 승부차기에서는 첫 번째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기도 했다.[50] 유벤투스에서의 자세한 활약은 유벤투스 시절 문단을 참고할 수 있다.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으로는 1987년 6월 10일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던 아르헨티나와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하여 3-1 승리에 기여했다.[50]유로 1988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출전 기회는 없었고,[50] 자국에서 열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3위 결정전에 풀타임 출전했다.[50] 그러나 유로 1996과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부상으로 인해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거나 불참했다.[50]유로 2000이 그의 마지막 메이저 국가대항전이었으며,[50] 국가대표팀 통산 49경기에 출전했다.[50]
2005년 5월 15일, 파르마와의 경기를 통해 세리에 A 통산 500경기 출전 기록을 달성하며 현역에서 은퇴했다.[50][54] 그는 나폴리 시절 동료였던 디에고 마라도나와 절친한 사이로도 알려져 있다.[52]
나폴리 태생의 페라라는 1980년 고향팀인 SSC 나폴리의 유소년 시스템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1984년 '프리마베라' 유소년 팀을 졸업하고 그 시즌부터 1군 팀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84-85 시즌에는 몇 차례 벤치에 앉았고, 1985년 5월 5일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렀다.[50] 1985-86 시즌에는 리그 14경기에 출전하며 점차 기회를 늘려갔다.[50]
1986-87 시즌부터 페라라는 팀의 주전 선수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1986년 10월 5일 토리노전에서는 프로 데뷔골을 기록했으며,[50] 해당 시즌 리그 28경기에 출전하여 나폴리의 구단 역사상 첫 세리에 A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 즉 '더블' 달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87년 6월 10일,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와의 친선 경기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이탈리아는 3-1로 승리했다.[50] 그는 1988년 유럽 선수권 대표팀 명단에도 포함되었으나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50]
페라라는 마라도나와 함께 나폴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8-89 시즌에는 UEFA컵 우승에 기여했는데, 특히 VfB 슈투트가르트와의 결승 2차전에서 골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도왔다. 1989-90 시즌에는 개인 통산 두 번째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1990년에는 1990년 FIFA 월드컵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가하여 3위 결정전에 풀타임 출전했으며,[50] 1990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는 유벤투스를 꺾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5]
1990-91 시즌 이후 마라도나가 팀을 떠나자 페라라는 팀의 주장직을 물려받았다.[50]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 부임한 1991-92 시즌에는 리그 4위를 기록하며 UEFA컵 진출권을 확보했고,[51]카레카, 잔프랑코 졸라 등 주축 선수들이 떠난 후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지휘한 1993-94 시즌에도 리그 6위로 UEFA컵 진출권을 따냈다.[50]
페라라는 나폴리에서 공식전 통산 322경기에 출전하여 15골을 기록했다.[50] 그는 나폴리 시절 함께 뛰었던 디에고 마라도나와 매우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52] 1994년 여름,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유벤투스로 부임하면서 페라라의 영입을 강력히 원했고,[52]AS 로마와 파르마 등의 관심에도 불구하고[50] 페라라는 리피 감독을 따라 유벤투스로 이적하게 된다.
1994년 여름, 나폴리에서 유벤투스로 부임한 마르첼로 리피 감독은 페라라의 영입을 조건으로 내걸었고[52], 페라라는 로마나 파르마 등의 다른 제안 대신 유벤투스 이적을 선택했다.[50] 그는 리피 감독 아래 빠르게 주전 자리를 확보했으며, 첫 시즌인 1994-95 시즌에는 모든 대회를 합쳐 40경기에 출전해 1골을 기록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 잡았다.[53] 이 시즌 유벤투스는 9년 만의 세리에 A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동시에 달성하는 '더블'을 기록했다.[50]
페라라는 당대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고, 이후 10년 이상 유벤투스에서 주전 자리를 지켰다. 주로 센터백으로 기용되었으며[50], 1995년부터 1996년까지는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으나, 1996년에 주장직을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에게 넘겨주었다. 유벤투스에서 뛰는 동안 그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수비 라인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파트너로는 마르크 율리아노, 모레노 토리첼리, 파올로 몬테로, 잔루카 페소토, 릴리앙 튀랑, 알레산드로 비린델리, 이고르 투도르, 잔루카 참브로타, 니콜라 레그로탈리에, 파비오 칸나바로 등 당대 최고의 수비수들이 거쳐갔다. 이 시기 유벤투스의 수비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유벤투스 소속으로 페라라는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세리에 A 우승 5회 (1994-95, 1996-97, 1997-98, 2001-02[50], 2002-03), 코파 이탈리아 1회 (1994-95),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4회 (1995, 1997, 2002, 2003), UEFA 챔피언스리그 1회 (1995-96), UEFA 슈퍼컵 1회 (1996), 인터콘티넨털컵 1회 (1996), UEFA 인터토토컵 1회 (1999)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1995-96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아약스를 상대로 승부차기 첫 번째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며 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50] 1996-97 시즌에는 리그 32경기에 출전해 4골을 기록하고 인터콘티넨털컵과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등 최고의 시즌 중 하나를 보냈다.[50] 반면 1997-98 시즌에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시즌 막판 부상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결장하기도 했다.[50]
2004-05 시즌을 끝으로 페라라는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 2005년 5월 15일, 파르마와의 경기는 그의 세리에 A 통산 500번째 출전이자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50][54] 이 시즌 유벤투스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이후 칼초폴리 스캔들에 연루되어 우승 기록이 박탈되었다. 그는 38세의 나이로 은퇴했으며, 같은 시기 팀을 떠난 베테랑 동료 마르크 율리아노, 파올로 몬테로와 함께 유벤투스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유벤투스에서 통산 358경기에 출전하여 20골을 기록했다.
3. 국가대표팀 경력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치로 페라라는 1987년 6월 10일,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와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하여 팀의 3-1 승리에 기여했다.[50] 그는 1990년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 2000 같은 주요 국제 대회에 참가했다. 1990년 월드컵에서는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3위 결정전에 풀타임 출전했으며,[50] UEFA 유로 2000은 그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가 되었다.[50]
UEFA 유로 1988에서는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50] 또한 UEFA 유로 1996[50]과 1998년 FIFA 월드컵은 부상으로 인해 참가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50] 특히 1998년 월드컵 불참은 아쉬움이 컸다. 당시 31세의 페라라는 유벤투스에서 최고의 시즌을 보내며 선수 경력의 정점을 찍고 있었고,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회를 불과 몇 주 앞두고 심각한 부상을 당해 월드컵 출전이 무산되었고, 그의 자리는 알레산드로 네스타가 대신하게 되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만약 그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으로 활약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치로 페라라는 우아하면서도 강력한 수비수로 평가받았다. 그는 침착함, 뛰어난 예측력, 기술, 그리고 볼 컨트롤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수비수로서 다재다능하여 센터백, 스토퍼, 풀백 등 다양한 수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으며, 대인 방어와 지역 방어 모두에 능숙했다. 신체적으로는 빠르고 운동 신경이 뛰어났으며, 공중볼 처리와 태클 능력도 우수했다. 또한 경기를 읽는 능력이 탁월하여 수비 라인을 효과적으로 지휘했다. 수비적인 능력 외에도 공격에 가담하는 능력이 뛰어나 센터백임에도 불구하고 선수 경력 동안 상당수의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뛰어난 기량과 더불어 경기장 안팎에서 보여준 품격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59]
5. 감독 경력
2005년 선수 은퇴 후,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이끄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기술 스태프로 합류하여 이탈리아의 우승에 기여했다.[55] 월드컵 이후에는 과거 소속팀 유벤투스로 돌아와 전 팀 동료였던 잔루카 페소토와 함께 유소년 부문 책임자(responsabile settore giovanile|레스폰사빌레 세토레 조바닐레ita)를 맡았다.[55] 2008년 7월, 피렌체 코베르치아노의 코베르치아노 기술 센터에서 UEFA 프로 라이선스를 취득했다.[62][19] 같은 해 마르첼로 리피가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하자 다시 기술 스태프로 합류했으나(유벤투스 유소년 책임자 겸임), 2009년 6월 유벤투스 감독으로 정식 부임하면서 이탈리아 축구 연맹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2008-09 시즌 막바지, 유벤투스가 7경기 연속 무승의 부진에 빠지자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 경질되었고, 2009년 5월 18일 페라라가 시즌 종료까지 남은 2경기를 책임질 임시 감독으로 선임되었다.[55] 그는 시에나 (3-0 승), 라치오 (2-0 승) 와의 경기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팀의 리그 2위 자리를 확정지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2009년 6월 5일, 유벤투스와 2년 계약을 맺고 2009-10 시즌 정식 감독으로 부임했다.[63][64][20][21][55]
여름 이적 시장에서 유벤투스는 브라질 국가대표 디에고와 펠리페 멜루, 2006년 FIFA 월드컵 우승 멤버인 파비오 칸나바로와 파비오 그로소, 우루과이의 젊은 수비수 마르틴 카세레스 (임대) 등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다. 시즌 초반 리그 4연승을 달리며 순조롭게 출발하는 듯했으나,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1-4로 대패하며 탈락하는 등[56] 점차 부진에 빠졌다. 이탈리아 더비에서 라이벌 인테르나치오날레를 꺾기도 했지만, 카타니아, 바리 등 약팀에게 연달아 패배하며 순위가 하락했다. 언론의 비판이 거세지는 가운데,[22] 결국 2010년 1월 코파 이탈리아 8강에서 인테르나치오날레에게 1-2로 패배한 후 경질되었고, 후임으로는 알베르토 자케로니가 임명되었다.[23][56]
2010년 10월 22일, 피에를루이지 카시라기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U-21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전 팀 동료 안젤로 페루치가 코치로 합류했다.[24][57] 페라라가 이끄는 U-21 대표팀은 2013년 UEFA U-21 유럽 선수권 대회 예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12년 7월 2일, U-21 대표팀 감독직을 사임하고 세리에 A로 막 승격한 삼프도리아의 감독으로 부임했다.[58] 그러나 성적 부진이 이어지자 5개월 만인 2012년 12월 17일에 경질되었다.[25][26][58]
이후 약 3년 반의 공백기를 거쳐 2016년 7월, 중국 갑급리그의 우한 줘얼 감독으로 부임하여 2017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나폴리 태생인 페라라는 1980년 SSC 나폴리 유소년팀에 입단하며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1984년 유소년팀을 졸업하고 같은 시즌 1군으로 승격하여, 1군 데뷔 시즌에 총 14경기에 출전했다. 다음 시즌부터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으며, 곧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어 1990년 FIFA 월드컵 최종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또한 1988-89 UEFA컵 결승전에서는 골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94년 여름,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이끌던 유벤투스로 이적했다.[5] 첫 시즌부터 40경기에 출전해 1골을 넣으며 빠르게 주전 자리를 확보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10년 이상 유벤투스의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다. 1995년과 1996년에는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페라라는 유벤투스 소속으로 세리에 A 5회[5] (1994–95, 1996–97, 1997–98, 2001–02, 2002–03), 코파 이탈리아 1회 (1994–95),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4회 (1995, 1997, 2002, 2003)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5] 또한 유럽대항전에서도 UEFA 챔피언스 리그 (1995–96)[31], UEFA 슈퍼컵 (1996)[33], 인터콘티넨털컵 (1996)[34], UEFA 인터토토컵 (1999)[32] 우승을 경험했다. 1996년 주장직은 후임자인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에게 넘어갔다.
유벤투스에서 뛰는 동안 페라라는 수비 라인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2년간 마르크 이울리아노, 모레노 토리첼리, 파올로 몬테로, 잔루카 페소토, 릴리앙 튀랑, 알레산드로 비린델리, 이고르 투도르, 잔루카 참브로타, 니콜라 레그로탈리에, 파올로 칸나바로 등 여러 선수들과 함께 수비진을 구축했다. 당시 유벤투스는 리그 최고 수준의 수비력을 자랑했다. 특히 1996-97 시즌에는 세리에 A 32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2004-05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끝으로 오랜 동료인 마르크 이울리아노, 파올로 몬테로와 함께 유벤투스를 떠났다. 페라라는 2005년 5월, 38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5] 그의 마지막 시즌 출전 기록은 리그 4경기였다.[28]
'''주요 우승 경력'''[5]
세리에 A: 1994–95, 1996–97, 1997–98, 2001–02, 2002–03
특히 1998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불운한 부상을 겪었다. 당시 31세였던 페라라는 유벤투스에서 최고의 시즌을 보내며 선수 경력의 정점에 있었고, 1996-97 시즌과 1997-98 시즌에는 이탈리아 내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대표팀 주전 자리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러나 월드컵 개막을 불과 몇 주 앞두고 심각한 부상을 당해 대회 출전이 좌절되었고, 그의 자리는 네스타가 대신하게 되었다. 이 부상 이후 페라라는 대표팀과 유벤투스에서 점차 후보 선수로 밀려났으며, 반면 칸나바로는 최고의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많은 전문가는 만약 페라라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1998년 월드컵에서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비록 해외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이탈리아 내에서는 여전히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치로 페라라는 동향 출신이자 전 수비수인 파비오 칸나바로와 함께 자선 재단인 ''칸나바로 페라라 재단''(Fondazione Cannavaro Ferraraita)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 재단은 고향 나폴리의 한 병원에 암 연구 장비와 특별한 경우의 암 수술을 제공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또한 재단은 나폴리의 위기에 처한 청소년들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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